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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연아를 통해 본 한국사회 영웅의 조건

지지플랏 2010. 5. 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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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원문 기사전송 2008-12-18 09:20

ㆍ그대, 우리 콤플렉스의 거울 우리의 자아도취

‘김연아 신드롬’이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국정을 포함한 사회 주요 현안까지 싹싹 쓸어 뒷구석으로 치워버리는 수준이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영웅’은 모두 스포츠에서 탄생했기에 (아마도 2006년 몰락한 황우석이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세계적 수준의 운동선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별로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연아라는 운동선수에게 열광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과거와 비슷하면서도 꽤 다르다.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지점과 열광의 작동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김연아에게 빠져 든 상당수는 스포츠팬이 아니고 피겨스케이트팬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럼에도 김연아는 피겨스케이트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던 우리 국민들을 붙들어 앉혀 ‘피겨공부’까지 하게 했다. 당연히 우리가 김연아에 환호하는 이유는 분명 ‘스포츠적’인 것만 아니다.

과거 등장했던 한국 사회 영웅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랜 세월 지지리도 못 살았던 약소국이었던 탓인지 우선 무조건 ‘세계적’이어야 한다. 바로 ‘국위선양’ 코드다. 사실 세계 어느 문화권이나 영웅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외국에선 소방수, 교사나 신체적 불리함이나 역경을 이겨낸 학생선수 등 ‘세계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경우가 많은 데 반해 우리는 민족의 탁월함을 세계만방에 알린 선수들만 선택했다. 가발 외엔 세계에 내놓을 게 없었던 1960~70년대, 세계무대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했던 김기수, 김일, 양정모, 홍수환, 차범근은 우리 국민의 움츠러든 가슴을 펴게 했다.

스포츠를 통한 국가주의적 자기만족이 작동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인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요~’라는 자기최면까지 가능케 됐고 여기에 가속도까지 붙었다. 앞뒤 안 가리고 영웅을 찾아 나선 우리에게 걸린(?) 인물이 바로 하인즈 워드와 추성훈이다. 우리가 멸시하고 핍박해 내쫓은 ‘튀기’가 유명하고 돈도 많은 ‘미제’가 되어 돌아오자 우리는 ‘한국인의 피’라며 열광했다. 그래도 쑥스러웠던지 갑자기 과거를 반성하자는 국민적 반성운동(?)까지 벌이며 우리의 모순됨을 합리화했다. 우리는 또 재일동포 추성훈이 한국에 있을 때는 거들떠도 안 보다가 그가 일본에 돌아가 성공하자 갑자기 돌변해 그를 ‘우리편’이라 우기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뒤틀어진 자화상이다.

90년대 이후엔 새로운 조건이 하나 추가됐다. 바로 ‘경제효과’ 코드다. 딱 10년 전 박찬호와 박세리는 외환위기 당시 달러벌이(?)의 선두주자로서 나라를 ‘국난’의 위기에서 구출할 인물로 묘사됐다. ‘월드컵4강 신화’조차 ‘축구4강에서 경제4강으로’라는 엽기적 논리로 곧장 전환된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경제강박’에 빠졌는지 잘 알 수 있다. 여기에 이어달리기 하듯 등장한 박지성, 황우석도 ‘국위선양+경제효과=영웅’이라는 한국 사회 영웅공식을 또 다시 증명했다.

김연아를 위시해 최근 등장한 박태환, 장미란, 최홍만, 추성훈 등에게서 우리는 영웅공식의 변화를 본다. 세계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적 색채는 많이 희미해졌다. 우리가 한·일간 대결구도보다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라이벌 관계에 더 집중했던 것부터가 그러하다. 또 우리는 이들을 경제효과로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 빈 공간을 채운 새로운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이들의 인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몸이다. 이제 근대화의 짐을 벗어 버린 우리는 탈근대적 우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조선이 개화하면서부터 우리 내면에는 왜소한 신체에 대한 민족적 콤플렉스가 자리해 왔다. 서구문물을 흠모했던 이광수는 조선인은 눈동자가 풀렸고, 팔다리는 늘어졌고, 가슴은 새가슴이라서 그 용모가 궁색하다고 묘사했다. 잡지 ‘개벽’은 조선인은 원래 어릴 때부터 업혀 길러진 데다 꿇어앉는 습관 때문에 다리가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난다고 하면서 운동을 해야 다리가 길어진다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윤치호가 황인종의 자랑이며 백인의 종 우월성을 타파한 것이라며 감격해 마지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조선시대 양반은 절대로 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뛰는 것을 천하게 여겼다. 어느 사학자의 말처럼 양반은 다리가 짧아야 했고 길면 상놈 취급당했던 것이다. ‘롱다리’ ‘숏다리’ ‘농다리’ 농담 시리즈가 괜히 나왔겠는가. 다른 이들을 다리 길이로 품평(?)하는 우리의 버릇 속엔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롱다리’는 민족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탈근대시대 스포츠영웅은 바로 이 민족적 콤플렉스를 날려버리는 치유의 장이 되었다. 장미란은 역기를 장난감 들 듯하며 천하를 제패했고, 최홍만은 그의 하드웨어 자체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다. 박지성은 지칠 줄 모르는 ‘산소탱크’를 장착하고 세계 최고의 팀에서 풀타임을 소화해 낸다. 떡 벌어진 가슴을 가진 6척 장신 박태환은 체급별 종목이 아닌 수영에서 신장 2m를 넘나드는 백인 선수들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체급에 상관없이 서구 선수들을 압도하는 신체와 힘과 기량을 지닌 우리 선수들을 보며 열광하고 행복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선수들이 보유한 몸의 힘과 ‘사이즈’에만 흡족해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다. 강철 같은 ‘갑빠’와 역삼각형 ‘등판’을 가진 박태환과 추성훈의 몸은 강력한 터보엔진을 장착한 근육질 스포츠카 같다. 그러나 동시에 매끄럽고 아름답다. 이들의 몸은 한 세기 전 조선인의 몸도, 근대화시기 이상적 남성형인 이대근, 백일섭의 몸도, 수영장 가서도 셔츠로 몸을 가리는 삼촌의 몸도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스포츠영웅에서 몇 걸음 더 진화한 것이 바로 김연아다. 우리가 그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경기력에도 경외감을 갖는다. 3회전 점프는 고도의 순발력과 근력이 버무려진 엄청난 점프력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런 점프력이 그 가냘픈 열여덟살 몸매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런 게 바로 모순이다. 초절정 몸의 완결판이다.

이제야 우리는 아름다움으로 승부하는 선진국형(?) 스포츠에서 세계적 선수를 갖게 됐다. 이제까지 우리는 한국을 세계에 빛낸 많은 여자선수들을 보았고 자랑스러워했다. 여자골프, 양궁, 쇼트트랙, 탁구, 유도 그리고 ‘우생순’까지.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이런 몸매를, 이런 ‘요정’을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세계적 요정’이다. 항상 웃는 얼굴이 예쁘면서도 귀엽다. 그래서 반짝반짝 빛나는 데다가 날씬하고 또 (두둥~) 길기까지 하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중년 여성들도 그의 몸을 즐겁게(?) 이야기한다. “피겨도 잘 타는데 몸두 너무 예뻐요~” 하면서 말이다. (재밌게도 중년 남성들은 다르다. 대부분 스케이트 잘 타고 얼굴도 예뻐 좋아하는 것이지 몸매가 예뻐서는 아니라며 극구 부인한다. 그대, 짐승들이여~)

이렇듯 요정 김연아는 수많은 열혈 광팬들을 양산해 내기 시작했는데 김연아에 대한 ‘팬덤’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지난주 김연아팬을 지칭하는 ‘승냥이’들은 그랑프리 파이널대회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 오른손으로는 미친 듯 ‘클릭질’을, 왼손으론 휴대폰 붙들고 ‘전화질’을 해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극한의 신체기능을 구사했음에도 결국 표를 구하지 못한 승냥이들은 절망에 빠진 서로를 위로했다. 극적으로 표를 구한 김연아팬들은 크고 작은 배너와 꽃, 곰인형을 준비해 가져갔는데 이틀 동안 곰인형만 1000개가 넘게 던져졌다고 한다.

그런데 인형들을 택배로 주문해서 다른 입장객들에게 나눠줘 이를 던지게 했다고 한다. 팬이라면 자기가 선물을 사서 전달하든 던지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꺼번에 많이 주문하면 싸서 그런가? 요즘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 들고 다니기 싫어서 그런가? 이는 자신의 애정과 사랑을 표현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우상의 인기를 물량공세로 증명하고 과시하려는 뒤틀어진 욕망의 표출이다.

팬들이 경기장에서 보여준 일방적이고도 폭력적(?)인 응원 행태도 이를 방증한다. 자기만족과 과시를 위해 경기장으로 쳐들어간 이들은 피겨스케이팅에서 필수적인 선수와 관중 간의 소통은 물론 관전예절조차 무시했다. 한 외국선수의 말처럼 그들은 ‘미친 듯한’ 괴성과 비명을 지르며 카타르시스의 수준을 넘어 자아도취에 빠졌다. 그들은 김연아의 아름다운 경기를 보러 간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김연아 인기의 크기와 강도를 확인하고 즐기기 위해, 또 외국인과 카메라 앞에서 과시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진군한 것이다.

선수에 대한 배려나 예절이 실종된 일방적이고도 호전적인 응원 덕에 전에 없이 긴장한 김연아는 실수 한 번 안 하던 트리플 살코에서 엉덩방아를 찧었고 장기인 트리플 러츠는 돌다 말고 내려왔다. 골프스윙 하려는데 카메라셔터 누르고 바둑대국장에서 비명 질러대는데 잘 할 선수 있을까. 결국 팬들이 김연아에게서 홈어드밴티지를 뺏어 가버린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팬덤보다는 ‘팬질’이라는 표현에 더 가까웠다.

한 방송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 한국 사람들은 수영이 아니라 박태환을, 역도가 아니라 장미란을, 피겨스케이팅이 아니라 김연아를 좋아한다. 그런데 김연아에겐 자신의 사랑을 표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명하려 한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스토커가 나온다. 김연아 팬들을 보면 어째 좀 불안하기만 하다.

<정희준 |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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